가짜가 가고 진짜가 왔다

GoodNovel 완결

육주한을 스폰해준 지 3년이 되던 해, 주이설의 집안이 부도났다. 아버지 주명진은 가문을 살리기 위해 주이설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했다. 그날 밤, 주이설은 전 재산을 챙겨 육주한과 함께 야반도주하려 했다. 그러다가 육주한이 일하는 바에서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마주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는 육주한의 몸짓에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흘렀다. 지난 3년 동안 주이설이 돈을 대주며 보살폈던 가난한 청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챕터 (1)

第1章

육주한을 스폰해준 지 3년이 되던 해, 주이설의 집안이 부도났다. 아버지 주명진은 가문을 살리기 위해 주이설에게 정략결혼을 강요했다. 그날 밤, 주이설은 전 재산을 챙겨 육주한과 함께 야반도주하려 했다. 그러다가 육주한이 일하는 바에서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마주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는 육주한의 몸짓에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흘렀다. 지난 3년 동안 주이설이 돈을 대주며 보살폈던 가난한 청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1화 “주한 형, 주씨 가문도 이제 끝이라면서? 딸까지 팔아 치울 기세던데 형 여자친구 좀 구제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여자친구는 무슨. 그냥 형이 심심풀이로 데리고 노는 장난감이지. 형의 진짜 여자친구가 곧 귀국한다잖아. 그때 되면 주이설 같은 멍청이랑은 바로 끝내고 갈아타겠지. 역시 우리 형 계산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다른 건 몰라도 주이설 걔 얼굴과 몸매는 끝내주던데. 즐길 거 즐기면서 돈까지 받아 챙겼으니 완전 남는 장사 한 거지. 그나저나 나송시의 내로라하는 재벌인 형이 맨날 기생오라비 취급당하면서 그 비위 맞춰준 것도 참 대단해.” “벌써 3년이나 됐는데 주이설은 형이 여기 직원이 아니라 사장이라는 걸 전혀 모른다며?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어?” 방 안에서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육주한이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여유롭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주이설에게 답장을 보냈다. 30분 전 주이설이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주한아, 우리 멀리 도망가서 살자. 응?] 주이설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그래.] 고개를 숙여 화면을 확인한 그때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야반도주? 걔가 도망가면 어디로 가겠어. 지금은 자기 아버지의 돈줄이나 다름없는데. 한 발짝만 움직여도 바로 잡혀서 팔려 갈걸?” 육주한이 담배를 비벼 끄더니 옆에 앉은 여자의 목에서 저렴해 보이는 목걸이를 아무렇지 않게 낚아챘다. 그 모습을 본 누군가가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 “또 주이설 주려고? 지난번엔 택배비 포함 2만 원짜리 은반지, 그전엔 플라스틱 조화를 주지 않았어? 걔도 명색이 재벌가 딸인데 눈이 왜 그렇게 낮아? 그런 거 받고 화도 안 내?” “걔는 내가 주는 거면 뭐든 좋아해. 그 은반지도 아까워서 못 빼고 다니거든.” 주이설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졌다.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렸다. 육주한이 반지를 선물했을 때 주이설은 진심으로 기뻤다. 그게 프러포즈를 암시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그저 그가 아무렇게나 던져준 싸구려 선물이었다니. 육주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이설을 기만하고 있었다.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는 주이설 앞에서 줄곧 가난한 척했다. 주이설은 진심으로 육주한을 좋아했다. 값비싼 옷과 명품 시계, 고급 차와 별장까지 아낌없이 내주었다. 남들이 그를 기생오라비라 비웃을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그를 감싸고 변호했다. 그런 주이설을 보며 육주한은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 주이설은 자신이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장대비를 맞은 바람에 집에 도착한 후 지독한 고열에 시달렸다. 혼미한 와중에 꿈을 꿨는데 육주한과 보낸 지난 3년의 기억들이었다. 3년 전, 이별의 아픔으로 술에 취해 있던 주이설은 바에서 눈에 띄게 잘생긴 육주한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화장실 앞에서 육주한의 앞을 가로막고 돈을 뿌리며 하룻밤을 함께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날 밤 이후 주이설은 육주한을 잊지 못했다. 그가 바에서 일하는 직원인 줄로만 알았던 주이설은 두 번째 만남에서 그의 스폰서를 자처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빠르게 연인 사이가 되었다. 주이설이 돈을 줬고 육주한은 다정한 남자친구 역할을 수행했다. 여느 연인들처럼 산책하고 쇼핑하고 영화도 봤다. 함께하는 3년 내내 관계의 주도권은 주이설에게 있었다. 결코 진심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정략결혼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주이설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아버지 주명진과 심하게 다툰 밤, 주이설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 육주한을 찾아가 물었다. “내가 돈이 없어도 계속 날 사랑해줄 거야?” 육주한이 주이설에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당연하지.” “주한아, 내가 망해서 모든 걸 다 잃는다고 해도 너만큼은 고생 안 시킬게. 그러니까 나 믿어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주이설은 모든 귀중품을 처분하여 도망칠 준비를 했다. 육주한과 다른 도시에서 새 삶을 시작할 것을 꿈꿨다. 그런데 오늘 밤 주이설은 자신이 꿈꿨던 새 삶이 사실은 사기극이었음을 깨달았다. 육주한은 단 한순간도 진실했던 적이 없었다. 밤이 지나고 열이 내릴 즈음 육주한이 돌아왔다. 뒤에서 주이설을 껴안은 그때 그에게서 주이설이 좋아하던 향수 냄새가 나지 않았다. “밤샘 근무했더니 피곤해 죽겠네. 월급 받자마자 네 선물부터 샀어.” 육주한이 그 여자에게서 뺏은 싸구려 목걸이를 꺼내 주이설의 목에 걸어주었다.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마음에 들어?” 주이설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응, 마음에 들어.” 육주한은 주이설의 반응이 평소와 다름을 눈치챘다. 예전 같으면 아이처럼 기뻐하며 감동했을 주이설이었다. 돈 아까우니 이런 거 사 오지 말라고, 그가 곁에 있는 게 최고의 선물이라 하던 모습은 없었다.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나 예전처럼 돈 많지 않으니까 돈 함부로 쓰지 마.” ‘주씨 가문이 망한 것 때문에 속이 타서 그랬던 거구나.’ 육주한이 주이설의 이마에 다정하게 키스했다. “걱정하지 마. 네가 그동안 준 용돈 다 모아뒀어. 바에서 받는 월급도 있으니까 이제 내가 너 먹여 살릴게.” 주이설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짓고는 씻으라며 육주한을 욕실로 밀어 넣었다.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육주한의 휴대폰이 울렸다. 보통 사이가 아님을 연상케 하는 메시지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 [주한아, 어젯밤 밤새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워. 3년이나 지났는데도 내가 좋아하는 향수 냄새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그 순간 주이설은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육주한이 갑자기 바꾼 향수는 다름 아닌 다른 여자가 좋아하는 향이었다. 주이설이 고열에 시달리고 있을 때 육주한은 다른 여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젠 지칠 대로 지쳤고 마음도 완전히 식어버렸다. 3년을 공들여도 녹이지 못한 마음이라면 더 이상 가질 이유가 없었다. 주이설이 베란다로 나가 주명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정략결혼 할게요. 제 마음이 바뀌기 전에 최대한 빨리 진행해 주세요.” ‘육주한, 내가 먼저 시작하자고 했으니 마무리도 내가 지을게.’ 제2화 샤워를 마친 육주한이 다가와 고개를 숙여 주이설의 귀를 깨물었다. 마디가 굵은 육주한의 손이 주이설의 옷자락 속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주이설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그대로 침대 위에 눕고 말았다. 그녀를 덮친 육주한이 그녀의 입술을 머금고 깊숙이 파고들려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육주한이 멈칫하더니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주한아, 우리 집에 도둑이 든 것 같아. 지금 와주면 안 될까?” 육주한이 휴대폰 너머의 여자에게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바로 갈게.” 통화를 마친 육주한이 주이설에게 미안하다는 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른 아르바이트 자리에 급하게 대타가 필요하대.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아.” 주이설이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너희 집에 안 좋은 일도 생겼는데 내가 더 열심히 벌어서 너 먹여 살려야지.” 그는 주이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는 옷을 갈아입은 뒤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렇게 밤늦게야 돌아온 육주한은 집안이 어딘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둘러보니 두 사람의 커플 아이템들이 전부 사라진 것이었다. 그 커플 아이템들은 데이트할 때마다 주이설이 정성껏 골라 샀던 것들이었다. “갑자기 웬 집 정리야? 이런 아기자기한 것들을 네가 제일 좋아했잖아.” 주이설이 남은 물건 몇 개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대꾸했다. “이제 다 싫증 났어. 나중에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그때 다시 사지 뭐.” 이유 모를 불안감이 밀려온 육주한이 급히 주이설의 손을 잡았다. “이 밤중에 어디 가려고?” “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잘게.” 육주한과 동거를 시작한 이후 주이설은 집에 별로 가지 않았다. 그를 미치도록 좋아하던 시절 주이설은 오직 그의 품 안에서만 안심하고 잘 수 있었다. 주이설은 육주한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짐을 챙겨 주저 없이 문을 나섰다. 차에 올라탄 그때 부동산 중개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이설 씨, 이 별장을 지금 급매로 내놓으시면 손해가 상당해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결정에 변함이 없으시면 바로 매물 올릴게요.” “가격이 얼마가 됐든 상관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처분해 주세요.” 이 별장은 3년 전 주이설이 육주한에게 사준 별장이었다. 서재, 욕실, 베란다에 두 사람의 은밀하고도 다정한 흔적이 배어 있었다. 집에 일이 생긴 뒤에도 주이설은 어떻게든 육주한에게 뭐라도 남겨주어 그의 앞으로의 삶을 보장해주려 애썼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이런 게 전혀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육주한은 주씨 가문이 부도나고 주이설이 정략결혼이라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 걸 뻔히 알면서도 방관했다. 주이설에게 돈이 절실했던 순간에도 그는 그녀의 앞에서 가난한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입가에 자신을 비웃는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누군가에게서 만나자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주이설 씨, 전 주한이의 전 여자친구 강한별이에요. 주한이가 제 얘기 한 번도 안 꺼냈죠?” “3년 전 제가 꿈을 위해 유학을 떠났을 때 주한이가 홧김에 저랑 냉전을 벌이긴 했지만 우린 한 번도 정식으로 헤어진 적 없어요. 이제 제가 돌아왔으니 당연히 저한테 돌아올 거예요.” “어젯밤 주한이가 밤새 집에 안 들어갔을 텐데 어디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설마 주한이가 정말 돈이 없어서 밤새 바에서 일한다고 믿는 건 아니죠?” 말을 마친 강한별이 은행 카드 한 장을 주이설에게 건넸다. “이설 씨가 지금 돈이 필요하다는 거 알아요. 이 카드 안에 60억이 있으니까 일단 급한 불부터 꺼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당장 주한이 곁에서 떠나주세요.” 제3화 순간 주이설은 목이 메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누군가에게 돈을 쥐여주며 정리하는 일은 본래 주이설이 가장 잘하던 것이었는데 이젠 그녀가 그 정리의 대상이 될 줄은 몰랐다. “강한별 씨가 이렇게 제멋대로 굴고 있는 걸 주한이는 알고 있나요?” 강한별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설 씨는 나와 주한이가 얼마나 깊은 사이인지 모를 거예요. 우리 예전에 결혼까지 할 뻔했던 사이예요.” “제가 바다를 좋아해서 주한이는 매년 다른 섬으로 휴가를 데려갔죠. 어릴 때 먹던 맛이 그립다고 하니까 아예 식당을 하나 사서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해줬어요.” “주한이 가슴에 있는 장미 반지 문신, 그거 제가 직접 새겨준 거예요. 나중에 저한테 결혼반지를 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주한이 집안 배경에 대해서도 더 설명해줄까요? 이설 씨는 주한이와 3년을 함께했으면서 주한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어요. 그런데도 여전히 주한이가 이설 씨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세요?” 주이설은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육주한의 모든 취향이 사실은 강한별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니. “이설 씨는 주한이를 스폰해줬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주한이는 이설 씨를 저의 대체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강한별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제 전화 한 통이면 주한이 바로 달려올 텐데. 저랑 내기 한번 해볼래요?” 주이설의 마음속에 순식간에 수만 가지 감정이 휘몰아쳤으나 결국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육주한과 처음으로 함께 보냈던 생일이 떠올랐다. 그가 모양도 볼품없고 맛도 없는 저렴한 케이크를 사 왔지만 주이설에게는 생애 가장 맛있는 케이크였다. 그날 그녀는 육주한의 품에 안긴 채 소원을 빌었다. “내년 생일도 주한이와 함께 보내게 해주세요.” 육주한이 웃으며 약속했다. “앞으로 매년 생일을 함께 보내줄게.” 또 한번은 주이설이 술에 취해 험한 일을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육주한이 도착했을 때 그녀는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끌어안고 약속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올게. 다시는 다치는 일이 없을 거야.” 약속이 육주한에게는 아무 가치 없는 것이었겠지만 그때의 주이설은 그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주이설이 주먹을 꽉 쥐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한별 씨 뜻대로 주한이를 떠날게요. 하지만 떠나는 이유가 오늘 한별 씨가 한 말들 때문은 아니에요.” 원하는 대답을 얻은 강한별은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승리자의 태도로 자리를 떴다. 그 후 며칠 동안 주이설은 정략결혼 준비로 정신없이 바빴고 육주한 역시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러다 주이설이 바를 찾았을 때 바 카운터 쪽에 앉아 있는 육주한을 발견했다. 넋이 나간 얼굴로 다른 곳을 응시하던 육주한은 주이설이 온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주이설이 육주한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 끝에는 강한별이 있었다. 강한별의 주변에 그녀를 탐내는 남자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아!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놓으라고요!” 강한별의 비명이 울려 퍼진 순간 육주한이 어두운 얼굴로 달려가 술병을 집어 들더니 한 남자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러고는 강한별을 품에 안고 지켜줬다. 그 기세에 눌려 누구도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주이설마저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육주한이 이토록 흥분한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는 강한별 때문에 분노하고 있었다. 육주한이 강한별을 건드린 남자의 손을 그대로 부러뜨렸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가 강한별을 데리고 자리를 뜬 뒤 소란을 피운 무리도 즉시 바에서 쫓겨났다. 주이설이 어느 한 룸을 지나가던 그때 안에서 여자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한아, 나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 너 여자친구 있잖아. 여자친구가 알면 기분 나빠할 거야.” “여자친구 같은 거 없어. 걔는 그냥 네 대체품일 뿐이야.” 제4화 문틈 사이로 주이설은 육주한이 강한별을 품에 안고 입을 맞추는 광경을 목격했다. 육주한의 말에 주이설은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강한별이 거짓말한 게 아니었다. 주이설은 그저 육주한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만난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든든한 돈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진실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그를 떠날 예정이었으니까. 주이설이 소리 없이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려 떠나려던 그때 복도에서 매캐한 연기가 순식간에 몰려왔다. “불이야! 불이야!” 경보음이 울려 퍼지자 바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방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에게 밀쳐진 주이설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으나 또 누군가에게 짓밟혔다. 고개를 들었을 때 주이설의 시야에 강한별을 품에 안고 안전한 곳으로 달려가는 육주한의 모습이 들어왔다. 주이설은 본능적으로 그를 향해 기어갔고 온 힘을 다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청했다. 인파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육주한이 고개를 돌렸다.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진 주이설을 본 순간 멈칫했다. 무의식중에 주이설을 구하려고 발길을 돌리려 했으나 품에 안긴 강한별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는 잠시 주춤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주이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지켜주겠다던 남자가 가장 위험한 순간에 그녀를 외면했다. 숨을 깊게 들이쉰 뒤 필사적으로 벽을 짚고 일어섰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인파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밀려 나와 안전을 확인한 뒤 다리에 힘이 풀린 주이설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마터면 정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주이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든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육주한과 눈이 마주쳤다. 육주한의 두 눈에 주이설이 이해할 수 없는 조바심과 후회가 서려 있었으나 그는 강한별의 곁을 지킬 뿐 주이설에게 단 한 걸음도 다가오지 않았다. ‘강한별이 오해할까 봐 두려운 거야?’ 주이설이 웃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손가락에 작은 상처만 나도 병원에 가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던 육주한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오직 강한별뿐이었다. 그녀는 홀로 집에 돌아와 구급상자를 꺼냈다.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 붕대로 감았다. 그러다가 결국 지친 몸을 이기지 못하고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예상대로 육주한은 돌아오지 않았다. 주이설은 그에게 어디 있는지 묻지 않았다. 날이 밝아 집을 나서려 할 때쯤에야 밖에서 돌아온 육주한과 마주쳤다. 육주한이 들어오자마자 주이설을 껴안으며 조심스럽게 상처를 살폈다. “병원엔 다녀왔어? 어디 더 아픈 데는 없고?” 그녀는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해? 너무 늦었다는 생각 안 들어?’ “미안해, 이설아. 어제 그 사람은 내 여동생이야. 어릴 때부터 불을 너무 무서워해서 곁을 떠날 수가 없었어.” ‘여동생이라...’ 그는 강한별을 위해 거짓 신분까지 만들어냈다. “여동생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육주한, 나 이제 돈 없어서 더는 못 줘. 그러니까 오늘부터 넌 자유야.” 육주한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주이설을 품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질렸으니까 버리겠다는 거야? 주이설, 난 못 받아들여. 네가 나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주이설은 허탈한 듯 고개를 젓고는 그를 천천히 밀어냈다. “육주한, 난 그냥 널 가지고 논 거였어. 설마 진심이었던 건 아니지? 지난 3년 동안 너한테 해줄 만큼 해줬어. 망한 나한테서 뭐 더 뜯어갈 게 남았어?” 육주한이 억지로 주이설을 품에 끌어안더니 그녀의 귀를 꽉 깨물었다. “어쨌든 난 너 안 떠나. 날 쉽게 버릴 생각은 하지도 마.” 제5화 육주한은 주이설의 태도가 예전 같지 않음을 눈치챘는지 그 후 며칠 동안 그녀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주이설을 외면했던 미안함을 씻으려는 듯 육주한은 특별히 유람선에서의 캔들 라이트 디너를 예약했다. 유람선 레스토랑 내부는 중세 영국풍의 고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창밖으로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웨이터가 꽃다발과 와인을 가져왔을 때 강한별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 육주한의 팔짱을 다정하게 꼈다. “어머, 주한아, 너도 여기 밥 먹으러 왔어?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주이설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 리 없었다. 모든 것은 치밀하게 계산된 만남일 뿐이었다. 어쩐지 육주한이 갑자기 이런 곳으로 데려온다 했더니, 결국 강한별과 마주치기 위한 구실이었다. “이설 씨, 제가 같이 식사해도 괜찮을까요?” 주이설에게는 거절할 권리조차 없었다. 육주한이 이미 강한별을 위해 의자를 빼주며 그녀가 합류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음식을 주문할 때 강한별이 웃으며 말했다.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시켰네? 이설 씨가 뭘 좋아하는지는 물어보지도 않은 거야?” 육주한이 그제야 메뉴판을 주이설에게 건네며 다정하게 물었다. “먹고 싶은 거 있는지 봐봐.” 주이설이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알아서 시켜.” 주이설에게는 모래를 씹는 듯한 한 끼였다.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강한별과 육주한을 보며 그녀는 불필요한 존재가 된 기분이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바람이라도 쐴 겸 밖으로 나갔다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 다른 구역에 발을 들였다. 어느 방 앞을 지날 때 누군가 주이설을 거칠게 안으로 잡아당겼다. “낯이 익다 했더니 주이설이었네. 온 김에 우리랑 술이나 한잔하고 가지?” “예전엔 콧대가 높아서 아무나 안 만나주더니 집안이 망하니까 결국 이런 데서 술 시중이나 들러 다니는 신세가 됐구나.” 주이설이 미간을 찌푸렸다. 과거 그녀를 오랫동안 쫓아다니던 자들이었는데 무시당했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미안한데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서 술 못 마셔.” 말을 마친 주이설이 나가려 하자 남자들이 문을 막아섰다.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밀려왔고 등 뒤로 한기가 번졌다. “주이설, 좋게 말할 때 마셔. 이젠 널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설마 네가 끼고 사는 그 기생오라비를 믿는 건 아니지?” “말 잘 들으면 험한 꼴 안 당해. 안 그러면 우리가 거칠게 나올 수도 있어.” 남자가 달려들던 순간 주이설은 숨이 멎었다가 이내 남자의 사타구니를 걷어차고 재떨이를 집어 들었다. “경고하는데 내 몸에 손대지 마. 손댔다간...” “손댔다간 뭐? 우리가 너 하나 제압하지 못할 것 같아?” 남자가 주이설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그 바람에 그녀는 머리가 핑 돌고 다리가 휘청거려 제대로 서 있지조차 못했다. 결국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테이블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쳤고 순식간에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남자들은 피를 보자 오히려 더 흥분한 듯 휘파람을 불며 억지로 주이설의 입에 술을 들이부었다. “오늘 아주 끝장을 내주마. 이미 더러워진 걸레 년이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방문을 거칠게 걷어찼다.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육주한은 두 눈에 핏발이 선 채 남자에게 달려가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죽고 싶어?” 육주한이 미친 사람처럼 남자를 피범벅이 되도록 때려눕혔고 마지막엔 그의 얼굴을 발로 짓밟으며 주이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게 했다. 주위 사람들이 달려들어 말린 뒤에야 육주한이 멈추더니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주이설을 안아 들고 급히 자리를 떴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 육주한이 조심스럽게 주이설의 이마를 닦아줬다. 어찌나 마음이 아팠는지 손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미안해. 그런 데 데려가는 게 아닌데. 다 내 잘못이야.” 주이설은 그의 말 중에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가식인지 더는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이 모든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방금 그 무리 중 몇몇은 육주한의 정체를 아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에게 감히 덤비지 못한 것이었다. 주이설이 붉어진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나 때문에 그 사람들 심기를 건드리면 어쩌려고 그래? 나중에 귀찮게 할까 두렵지도 않아?” 육주한이 주이설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었다. 마음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안 두려워. 나한텐 네가 제일 중요하니까.”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만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주이설은 아마 이 말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거짓이었고 육주한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를 이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차 안에 무거운 정적이 감돌던 그때 육주한의 휴대폰 벨 소리가 그 정적을 깼다. 전화를 받은 육주한이 멈칫하더니 안색이 급격히 나빠졌다. “이설아, 병원에 혼자 갈 수 있지?” 주이설은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차가 길가에 멈추자 육주한이 주저 없이 내렸다. 백미러 너머로 사라지는 육주한의 모습을 보며 주이설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은 곧 멈추지 않는 눈물이 되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방금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주한아, 한별이한테 일이 생겼어. 빨리 와.” 제6화 주이설은 홀로 병원에서 상처를 치료한 뒤 의사 진료실로 불려갔다. 방금 나온 검사 결과지를 내려다보던 주이설은 둔기가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아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말도 안 돼.’ 육주한과 관계를 가질 때마다 피임을 철저히 했고 설사 분위기에 취해 잊은 날이 있더라도 꼭 사후 피임약을 챙겨 먹었다. ‘왜 하필 이때 아이가 생긴 거냐고.’ “선생님, 수술 예약 잡아주세요. 최대한 빠른 날짜로요.” 수술은 사흘 뒤로 잡혔다. 그 사흘 동안 육주한은 주이설에게 단 한 통의 전화도 걸지 않았다. 휴대폰에 뜬 친구 추가 요청을 확인한 주이설은 홀린 듯 수락 버튼을 눌렀다. 강한별의 SNS는 마치 연애 일기장 같았다. 그녀가 귀국한 뒤 육주한과 함께 보낸 나날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육주한은 강한별을 위해 직접 요리했고 그녀에게 떠먹여 주기까지 했다. 병원 생활이 지루할까 봐 매일같이 값비싼 선물을 준비해 그녀를 기쁘게 했다. 그리고 유머집을 뒤져가며 늦은 밤 잠 못 드는 강한별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뿐만이 아니라 지극정성으로 강한별을 간호했고 퇴원하는 날에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다고 했다. 주이설은 그 모든 것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문득 육주한과 처음 만났던 그때가 떠올랐다. 당시 주이설은 잦은 접대 때문에 만취하기 일쑤였고 육주한은 늘 바 앞에서 그녀를 기다려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구토하면서 괴로워할 때 곁을 지키며 돌봐주던 육주한의 모습에 주이설은 그가 그녀를 진심으로 아낀다고 믿었다. 비록 그 진심이 돈으로 쌓아 올린 것이라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이설은 이젠 깨달았다. 그녀만 육주한을 외로울 때 부르는 심심풀이용 장난감으로 여긴다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녀가 육주한의 장난감이었다는 것을. 그날 밤 주이설은 또 술에 잔뜩 취했다. 같은 꿈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꿨는지 모른다. 꿈속에서 육주한에게 그녀와 결혼해줄 수 있느냐고 묻고 또 물었지만 그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초조함과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눈을 떴을 때 주이설의 앞에 복잡한 눈빛을 한 육주한이 있었다. “무슨 꿈을 꿨길래 자면서까지 이렇게 울어?” 주이설은 얼굴을 만져보고서야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며 요동치는 심장을 억눌렀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꿈. 나랑 결혼할 생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는 꿈.”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지만 육주한의 두 눈에 찰나의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주이설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 보지는 못했다. 육주한이 주이설을 끌어안고 당황한 말투로 말했다. “요 며칠 내가 안 들어와서 보고 싶었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내가 너 말고 누구랑 결혼하겠어?” “이설아, 지금은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너한테 최고로 좋은 걸 줄 수가 없어. 널 고생하게 하고 싶지 않아. 돈 많이 벌면 가장 먼저 너한테 프러포즈할게. 응?” 주이설이 그의 품에 안긴 채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저도 모르게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전 어느 날, 관계를 가진 뒤 주이설이 농담처럼 물은 적이 있었다. “매일 이렇게 하다가 나 임신이라도 하면 어떡해?” 그때 육주한이 진지한 얼굴로 주이설을 달랬다. “난 너 닮은 아이 갖고 싶어. 내가 키울 능력이 생기면 그때 갖자. 응?” 주이설이 말없이 육주한의 품에서 벗어나자 육주한이 그녀를 잡고 자리에 앉혔다. “지난번에 이 집 케이크 먹고 싶다고 했지? 내가 이거 사려고 두 시간이나 줄 섰어. 얼른 먹어봐.” 바로 그때 강한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케이크 맛있어요? 내가 그냥 지나가는 말로 먹고 싶다니까 주한이가 바로 가서 사 오더라고요. 이설 씨 것도 사라고 했는데. 좋아하는 맛 맞죠?] 순간 허무함이 밀려온 주이설은 주저 없이 케이크를 집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주이설이 여전히 심통을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육주한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육주한, 나 망고 알레르기 있어.” 제7화 육주한의 얼굴에 찰나의 죄책감이 스치더니 주이설을 품에 안고 다정하게 달랬다. “미안해.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어. 꼭 보상할게.” 다음 날, 육주한은 서프라이즈 선물이 있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주이설을 차에 태웠다. 30분 뒤 차가 멈춰 선 곳은 한 웨딩드레스 샵이었다. 육주한이 미리 골라두었다는 드레스들을 보며 주이설이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여긴 왜 데려온 거야?” “너 결혼하고 싶어 했잖아. 드레스 한번 입어보고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미리 사두려고.” 육주한의 말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으나 주이설의 속은 씁쓸함으로 가득 찼다. ‘사서 뭐 하게? 장식품으로 걸어두려고?’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주이설도 곧 있을 정략결혼을 위해 드레스를 골라야 했다. 결국 인내심을 갖고 드레스를 여러 벌 입어봤다. 마지막 드레스를 입어보던 그때 육주한이 드레스를 가리키며 점원에게 말했다. “이걸로 하죠. 포장해서 이 주소로 보내주세요.” 육주한은 별장 주소를 적은 뒤 주이설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설아, 이 드레스 입은 모습 정말 예뻐.” 주이설이 떠보듯 물었다. “이 드레스 엄청 비쌀 텐데? 내가 계산할게.” “드레스 한 벌 정도는 나도 살 능력이 돼.” 육주한이 주이설의 손을 잡았다. 그러다 주이설이 늘 보물처럼 아끼던 싸구려 은반지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의 마음에 순간 당혹감이 밀려왔다. “반지는?” 주이설이 손을 빼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잃어버릴까 봐 다른 곳에 넣어뒀어.” “비싼 것도 아닌데 잃어버리면 다시 사면 되지. 이설아, 나한테 시간을 조금만 더 줘. 돈 많이 모으면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 사서 정식으로 프러포즈할게.” 거짓말은 한 번으로 족했다. 주이설의 마음속에 이젠 끝을 알 수 없는 비웃음만 남았다. 육주한이 주이설의 손가락에 남은 반지 자국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맞췄다. 그의 시선이 주이설의 뒤쪽으로 향한 그때 안색이 급격히 변했다. “이설아, 드레스 몇 벌 더 입어보고 있어.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올게.” 그러고는 주이설을 놓아주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의 안색이 심상치 않은 걸 알아챈 주이설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그의 뒤를 쫓았다. 육주한을 따라가 보니 앞쪽 교차로에서 끔찍한 교통사고가 발생해 있었다. 강한별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육주한 역시 부상을 입었음에도 강한별을 품에 안은 채 놓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구급차로 옮겨지던 그때 육주한이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간호사의 손을 붙잡았다. “여자부터 살려주세요...” 주이설이 멀어져 가는 구급차를 보며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젊은 커플이 싸웠나 봐. 여자가 홧김에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드니까 남자가 구하려다가 같이 치인 것 같더라고. 보아하니 남자가 더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사고 나기 직전까지 남자가 여자한테 잘못했다고 빌고 있었어. 참 안됐네.” 주이설은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심장이 반으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와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굽혔다. 눈앞에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주이설은 깨달았다. 육주한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 어떤 모습인지를. 주이설이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지난 3년 동안 철저히 기만당해온 자신이 우스울 뿐이었다. 그때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주이설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를 들었다. “주이설 씨, 내일 오전 10시에 수술 진행하니까 늦지 않게 내원해 주세요.” 제8화 수술실로 들어가던 순간 주이설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차가운 수술 도구가 몸에 닿자 주이설이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지난 3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생리통으로 배가 아플 때면 육주한은 정성껏 생강차를 끓여줬고 따뜻한 손으로 배를 문질러주며 마음 아파했다. “내가 대신 아파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와 다투다 뺨을 맞은 날, 빨갛게 부어오른 주이설의 얼굴을 본 육주한은 이성을 잃고 당장이라도 주씨 가문에 쳐들어가 따지겠다며 날뛰기도 했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고열에 시달리는 주이설을 업고 병원까지 단숨에 달려갔고 그녀가 악몽을 꾸자 다정하게 달래기도 했다. “이설아, 무서워 마.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 육주한의 연기가 그토록 완벽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너무 둔해서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어버린 것인지 이젠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다정한 목소리와 따뜻한 온기가 오가던 그 순간들에 육주한은 과연 주이설을 누구라고 생각했던 걸까? 주이설이 지친 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육주한, 넌 평생 모를 거야. 우리한테 형체조차 갖추지 못한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수술이 끝나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병실 복도를 지나던 주이설의 귀에 간호사들의 잡담이 들려왔다. “어제 들어온 그 커플 말이에요. 남자가 엄청난 재력가인데 여자친구 요양시키려고 VIP 병동 한 층을 통째로 빌렸대요. 오늘 눈 뜨자마자 여자친구부터 보러 간 거 있죠?” “여자가 아직 화가 안 풀렸는지 계속 용서해주지 않으니까 남자는 다친 와중에도 병실 밖을 떠나지 않고 여자를 한참 동안 달래더라고요. 여자를 저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를 처음 봤어요. 어찌나 부럽던지. 드라마에서도 그렇게는 안 할걸요?” 주이설이 씁쓸한 마음을 안고 VIP층으로 향했다. 병실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리자 육주한의 품에 안겨 울면서 그를 원망하는 강한별의 모습이 보였다. “주한아, 아직도 내가 유학 갔던 것 때문에 화난 거야? 지난 3년 동안 난 단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어.” “하루라도 빨리 공부 끝내고 네 곁으로 돌아오고 싶었다고. 그동안의 빈자리를 내가 다 보상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나를 속여?” 육주한이 애틋한 손길로 강한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한별아, 난 널 속인 적 없어. 내 마음속엔 언제나 너뿐이었어.” “그럼 주이설은 뭔데? 드레스까지 맞추러 갔다며. 정말 그 여자랑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야? 네 아버지가 그 여자 결혼시키려고 여기저기 남자 알아보고 다닌다니까 마음이 흔들리기라도 한 거야?” “내 말 좀 들어봐. 그래도 3년이나 내 곁에 있었잖아. 그건 일종의 작별 인사였어. 마지막으로 기분 좋게 해주고 나서 확실히 정리하려고 했던 거야.” “주이설이 나한테 잘못한 건 없으니 나쁘게 끝내고 싶지 않았거든. 너한테 했던 약속 잊지 않았어. 나 육주한이 결혼할 사람은 너밖에 없어.” 강한별이 서럽게 눈물을 쏟아냈다. “그럼 지금 당장 헤어져. 네가 그 여자랑 같이 있는 거 더는 보고 싶지 않아. 넌 나 혼자만의 것이어야 해.” 육주한이 강한별을 품에 꽉 끌어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다정하게 달랬다. “알았어.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주이설이 허탈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사랑하는 연인의 눈물겨운 재회라니, 참으로 아름답네.’ 주이설은 더는 보지 않고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별장으로 돌아온 주이설이 마지막 짐을 정리하던 중 주명진의 전화를 받았다. “내일 오전 영군시로 가는 10시 비행기야. 심씨 가문 사람들이 공항에 마중 나올 거야.” “알았어요. 시간 맞춰 공항에 갈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육주한이 집으로 들어왔다. “공항이라니? 어디 가려고?” 주이설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일 때문에 지방에 출장 좀 다녀오려고.” 제9화 주이설의 대답을 들은 육주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옷을 몇 벌 챙기면서 그녀에게 설명했다.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했는데 며칠 동안 교육을 받으러 가야 해. 보고 싶을 거야, 이설아.” 주이설이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별의 곁을 지키러 가는 거겠지.’ 그녀는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드레스룸에 지난 3년 동안 주이설이 육주한에게 사준 옷과 선물들이 가득했다. 반면 육주한이 주이설에게 준 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그날 밤, 주이설은 서둘러 별장 매매 계약서에 서명을 마쳤고 이후의 모든 절차를 부동산 중개인에게 맡겼다. 떠나기 전 마지막 밤, 주이설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술기운이 오르자 머리가 지끈거린 주이설은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2층에서 1층 정원을 내려다봤는데 통째로 대관된 상태였다. 화려하고 정성스럽게 꾸며진 정원은 누가 봐도 프러포즈를 앞둔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이설은 육주한의 모습을 발견했다. 블랙 맞춤 정장을 차려입은 육주한이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을 풍기고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강한별이 서서히 다가오는 육주한을 바라보았고 오만하고 고귀하던 남자는 강한별 앞에 경건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아름다운 꽃다발을 건넸다. “한별아, 나랑 결혼해줄래?” 강한별은 이미 울음이 터진 상태였다. 주변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그녀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육주한이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강한별의 손가락에 끼워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품에 안고 입을 맞췄다. 그 순간 강변의 밤하늘 위로 천 대의 드론이 동시에 떠올랐다. 드론들이 육주한의 사랑이 담긴 글을 하나하나 수놓다가 마지막에 문장을 완성했다. [강한별, 나랑 결혼해 줘.] 알고 보니 육주한의 프러포즈 현장이었다. 주이설은 육주한이 그녀에게 어떻게 프러포즈할지 수만 번을 상상했었다. 지금 그 광경을 보고 있지만 프러포즈의 주인공은 주이설이 아니었다. “이설아,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살 수 있게 되면 그때 꼭 프러포즈할게.” “이설아, 내가 능력이 되면 그때 너랑 결혼할게.” “이설아...” 주이설을 달래던 달콤한 말들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의 주이설은 정말로 그날이 올 거라 믿었었다. 하지만 진실은 잔혹했다. 육주한은 주이설을 구할 능력이 충분했음에도 정략결혼으로 내몰리는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주이설은 묻고 싶었다. 단 한순간이라도 그녀에게 진심이었던 적이 있었느냐고.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비웃으며 다시 룸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동이 틀 때까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 뒤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려 확인해보니 육주한이었다. [이설아, 몇 시 비행기야? 도착하면 꼭 연락해. 걱정되니까.] 육주한은 아직도 연기를 하고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주이설은 그의 모든 연락처를 삭제하고 차단했다. 비행기가 이륙하던 순간 주이설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모든 기억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3년간 쏟아부은 진심은 그저 꿈일 뿐이었다. 이제 꿈에서 깼으니 다른 이의 아내가 되기 위해 떠났다. ‘안녕, 육주한. 이번 생에선 다시는 보지 말자.’

More GoodNovel Nov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