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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 된 위장 이혼
결혼 3주년 기념일인 날은 심유하의 27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남편 고태준은 심유하에게 특별한 선물을 건넸다. 바로 협의이혼합의서 한 장이었다. 평온한 얼굴로 펜을 든 고태준은 서류 왼쪽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뒤, 서류를 심유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예린이 고집이 워낙 세서 좀처럼 달랠 수가 없어. 일단 이혼해야 나를 받아 줄 것 같아.” “난 이미 사인했으니까 너도 해.” “걱정하지 마. 그냥 형식만 갖추는 거야.” 고태준의 말투는 담담했고 그 어떤 감정의 기복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늘 저녁에 뭘 먹을지 이야기하는 것처럼.
챕터 (1)
第1章
결혼 3주년 기념일인 날은 심유하의 27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남편 고태준은 심유하에게 특별한 선물을 건넸다. 바로 협의이혼합의서 한 장이었다.
평온한 얼굴로 펜을 든 고태준은 서류 왼쪽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뒤, 서류를 심유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예린이 고집이 워낙 세서 좀처럼 달랠 수가 없어. 일단 이혼해야 나를 받아 줄 것 같아.”
“난 이미 사인했으니까 너도 해.”
“걱정하지 마. 그냥 형식만 갖추는 거야.”
고태준의 말투는 담담했고 그 어떤 감정의 기복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늘 저녁에 뭘 먹을지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1화
심유하는 요즘 고태준이 밖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을 도배한 기사 탓에 하예린이라는 사람을 모를 수가 없었다.
고태준의 회사가 새로 계약한 신인 배우, 20살을 갓 넘긴 한창 풋풋한 여자였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고태준이 두 달 가까이 대놓고 쫓아다녔는데도 불구하고 하예린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예전의 여자들은 한 달을 채 넘기기도 전에 고태준 쪽에서 먼저 흥미를 잃었다.
그런데 하예린만은 달랐다.
고태준의 기록을 깨뜨린 것은 물론, 위장 이혼이라는 말까지 꺼내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심유하는 이혼 서류를 받아 들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게 나한테 준비한 선물이야? 꽤 특별하네.”
그 말에 고태준의 얼굴에 좀처럼 보기 힘든 얼떨떨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떠올렸는지 눈에 약간의 미안함도 스쳤다.
“요새 촬영장에서 예린이 달래느라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자 네 생일인 걸 잊었어. 미안해. 선물은 이따가 비서한테 보내라고 할게.”
‘새 사람이 생기니 난 정말로 그대로 잊혔구나.’
심유하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됐어. 어차피 이혼할 사이인데, 선물은 다른 사람한테 줘.”
그러자 고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못마땅한 기색으로 반박했다.
“위장 이혼일 뿐이야. 서류에 사인해서 어린애 달래는 것뿐이지, 우리가 진짜 이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과연 그럴까?’
하지만 심유하는 이미 가짜를 진짜로 만들기로, 고태준과 이혼하기로 마음을 굳힌 뒤였다.
심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펜을 들어 한 획 한 획 자신의 이름을 적고, 3년이라는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인이 끝나자 한숨을 돌린 고태준은 이혼 서류를 사진으로 찍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고태준은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지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나 이혼했어. 이제 떳떳하게 나랑 만날 수 있어. 촬영장에서 얌전히 기다려. 데리러 갈 테니까 우리 축하하자.”
전화를 끊은 고태준은 곧바로 몸을 일으킨 뒤 외투를 집어 들고 문밖으로 향했다.
문이 거의 닫히려는 순간에야 뭔가 떠오른 듯 심유하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예린이가 나랑 사귀기로 한 첫날이라서 내가 곁에 있어 줘야 해.”
“내년에 네 생일이랑 기념일은 같이 보낼게.”
말을 마친 고태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닫고 자신의 새로운 연인에게 달려갔다.
물론 심유하가 나지막하게 건넨 대답은 전혀 듣지도 못했다.
“고태준, 우리한테 내년은 없어.”
문밖의 자동차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심유하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금고를 열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넣어 둔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냈다.
서류를 펼치다 보니 혼인신고를 기념하면서 찍은 사진이 보였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24살의 심유하와 26살의 고태준은 바싹 붙어 있었고, 눈에는 서로를 향한 사랑과 결혼생활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다.
심유하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사인이 끝난 이혼 서류로 갔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다 지금 이렇게 된 걸까?’
고태준을 처음 만난 건 어느 종방연 자리였다.
그때 심유하는 이제 막 연예계에 발을 들인 신인이었다. 복도 모퉁이에서 위를 움켜쥔 채 안색이 창백해진 고태준을 우연히 마주쳤다.
술을 많이 마셔서 속이 불편한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심유하는 가방에 있던 요구르트 한 병을 건넸다.
그 한 번의 호의가 고태준으로 하여금 심유하에게 조금씩 관심을 두게 만들었고, 그 관심은 결국 좋아하는 마음으로 변했다.
그런데 고태준이 누구인가?
고씨 집안의 후계자이자 전형적인 재벌가 상속자, 보통 사람은 영영 닿을 수 없는 세계의 사람이었다.
심유하는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재벌가 도련님이 자기 같은 평범한 여자를 좋아할 리 없었다. 그저 재미 삼아 한번 놀아 보려는 거라고 생각해서 망설이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태준은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늘 심유하의 곁을 맴돌았다.
고고한 대기업의 대표가 어느새 심유하의 매니저처럼 끼니때마다 직접 만든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연달아 촬영하다 심유하가 아프기라도 하면 다급하게 병원으로 데려갔다. 물속 장면을 촬영하고 나오면 언제나 가장 먼저 따뜻한 생강차를 건넸다.
심유하도 감정이 없는 로봇이 아니었기에, 날마다 쌓이는 이런 따뜻한 온기 속에서 고태준에게 조금씩 마음을 빼앗겼다.
심유하가 고태준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어젖힌 것은 한 번의 와이어 액션 사고였다.
하강 도중 사고가 발생해서 심유하가 떨어지려는 순간, 고태준이 자신의 몸으로 심유하를 받아 냈다.
심유하는 다행히 멀쩡했지만, 이로 인해 고태준은 갈비뼈가 두 개나 부러졌다.
정식으로 사귀고 난 뒤, 고태준은 집안에다 이번 생에는 심유하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집안에서 아무리 반대해도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고태준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아서 심유하는 죽기 살기로 작품을 했다.
4년 동안 조금씩 올라갔고, 마침내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뒤에야 고씨 집안의 인정 아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던 날, 온 네티즌들이 두 사람의 백년해로를 빌었다.
심지어 고태준이야말로 재벌가에 드문 한결같은 사랑꾼이라고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유하도 두 사람의 결혼이 평생 달콤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결혼 이듬해, 고태준의 셔츠에 립스틱 자국이 찍혀 있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 심유하는 걷잡을 수 없이 울었다. 늘 도도하던 고태준은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경쟁사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일 뿐이며, 앞으로 절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심유하는 두 사람의 오랜 세월을 생각해서 용서를 택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고태준은 점차 밤늦게 귀가하기 시작했다.
심유하는 미친 사람처럼 수도 없이 전화를 걸어 따졌고 뒤를 밟기도 했다.
그리고 고태준이 집에 돌아오면 또다시 발작하듯 싸웠다.
그럴 때마다 고태준은 그저 심유하가 감정을 쏟아 내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평온하게 타일렀다.
“유하야, 우리 업계에서 평생 한 여자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고, 고태준의 아내 자리는 너라는 것만 알면 돼. 그거면 충분하잖아.”
고태준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가 심유하를 타일렀다.
바깥의 여자들은 그저 스쳐 가는 사람들이니, 고태준의 아내 자리만 잘 지키고 있으면 된다고 했다.
고태준은 결국 가정으로 돌아올 테니 그저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심유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 끝에 다다른 것이 바로 오늘, 고태준이 자신의 어린 연인을 위해 위장 이혼을 꺼내 든 것이다.
고태준이 자신의 이름을 적는 순간, 심유하의 마음을 꽉 묶고 있던 족쇄가 갑자기 풀렸다.
심유하가 고태준과 결혼한 건 고씨 집안의 돈과 권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두 사람 사이의 순수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사랑은 진작에 악취를 풍기는 시궁창으로 변해 버렸다.
한때 두 사람이 더없이 소중히 여겼던 결혼마저, 고태준은 어린 연인을 달래는 데 이용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결혼을 더 이상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정신을 차린 심유하는 이혼 서류를 챙겨서 가정법원으로 향했다.
협의이혼 신청을 마친 뒤, 법원에서는 숙려기간을 거치고 다시 방문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가정법원을 나서자 햇빛이 심유하의 몸 위로 쏟아졌다. 심유하는 오랜만에 홀가분함을 느꼈다.
이어서 오래전부터 저장해 둔 번호 하나를 눌렀다.
“앨런 감독님, 전에 영국에서 작품 찍자고 하셨죠? 저 그거 할래요.”
제2화
전화기 너머에서 와장창 소리가 나더니 조금 지나자 앨런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하 씨, 드디어 승낙해 줬네요! 이 배역은 계속 유하 씨를 위해 비워 두고 있었어요!]
[난 확신해요. 유하 씨가 출연한다면 이 영화는 반드시 대박을 치고 영화제 상을 휩쓸 거예요!]
고태준과 결혼하기 전, 시어머니인 윤정옥은 결혼 후 가정에만 전념하고 더 이상 연기를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3년 동안 가끔 고태준의 동반자로 꼭 필요한 행사에 참석한 것 말고는, 사실상 연예계를 떠나 있었다.
3년 전 트로피를 손에 들었던 최연소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어떤 모습이었는지조차 거의 잊고 있었다.
다행히 한 달 뒤면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고, 자신이 사랑했던 연기의 길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유하 씨, 언제 영국으로 올 거예요? 저는 유하 씨가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릴게요!]
심유하는 달력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다음 달 6일이에요.”
그날은 딱 한 달 뒤로, 바로 이혼 절차가 마무리되는 날이었다.
이혼이 마무리되는 대로 영국으로 날아갈 참이었다.
앨런과 앞으로 맡게 될 배역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심유하는 전화를 끊었다.
차에 올라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특별 알림으로 설정해 둔 소리였다.
심유하가 휴대폰을 확인하자 고태준의 최신 SNS 게시물이 떴다.
[너만 나와 함께해 준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첨부된 사진에는 이혼 합의서와 함께 하예린과 고태준이 깍지 낀 손을 찍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고태준의 SNS 계정은 7년 전에 만든 것이었고, 그동안 올린 게시물은 모두 3개뿐이었다.
첫 번째는 심유하와 연애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공개한 글이었다.
두 번째는 심유하가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축하를 전한 글이었다.
세 번째는 결혼식 당일 올린 공개적인 사랑 고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세 게시물마저 모두 삭제된 상태였다. 남은 것은 가장 최근에 올라온 이 글 하나뿐이었다.
댓글창에서는 하예린의 팬들이 저마다 축하를 보내고 있었다.
[꺄아악, 대표님이랑 화려한 여배우라니, 완전 취향 저격!]
[우리 예린이는 이 정도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지! 그 늙은 여자는 진작에 꺼졌어야 했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심유하라는 이름도 오랜만에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전 여우주연상 수상자 심유하, 재벌가에서 쫓겨나...]
[충격! 한때의 잉꼬부부, 결혼 3년 만에 결국 파경!]
고태준과 결혼할 때만 해도 심유하는 두 사람이 오늘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씨 집안이 가장 심하게 반대하던 시절도 함께 버텨 냈는데, 정작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태준의 바람이었다.
심유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쓰라림을 꾹 눌러 삼키고, 고태준의 게시물 아래에 댓글 하나를 남겼다.
[새로운 사람 만난 거 축하해.]
전송을 누르자마자, 마침 전 매니저 양선주의 전화가 걸려 왔다.
[유하야, 너 고 대표랑...]
양선주는 심유하가 신인 시절부터 차근차근 성장해서 여우주연상을 받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곁에서 쭉 지켜본 사람이었다.
결혼 후 심유하가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게 된 뒤에도 두 사람은 친구로 지냈다.
심유하는 양선주가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 사실이야. 나 고태준이랑 이혼 서류에 사인했어.”
양선주가 잠시 침묵하더니, 목소리에 짙은 감회를 담아서 말했다.
[그때 고 대표가 너한테 진심으로 잘해 주는 걸 봤으니까, 나는 그 사람이 다른 부자들하고는 다른 줄 알았어.]
햇빛이 나뭇가지 끝에 내려앉으면서 심유하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고태준과 결혼할 때 심유하도 그렇게 믿었다.
돈 많은 사람들 가운데 드물게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고태준은 그저 자신의 본모습을 너무 잘 숨기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고태준이 배우를 했다면 분명 남우주연상감이었을 것이다.
여우주연상을 받은 심유하마저 완벽하게 속인 연기력이었으니까.
“됐어, 그 얘기는 그만하자. 시상식 시간 맞춰서 와. 나는 벌써 도착했어.”
결혼 전 심유하는 여주인공으로 마지막 영화 ‘미양’에 출연했다.
후반부 작업 분량이 워낙 방대해서 지난해에야 개봉했지만, 이미 국제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상을 수상했다.
심유하 역시 이 작품의 배역으로 청화영화상 최우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시상식은 바로 오늘이었다.
전화를 끊은 심유하는 곧장 시상식장으로 차를 몰았다.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입구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심유하의 눈에 마침 하예린이 고태준의 팔짱을 낀 채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을 발견하자,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질문을 쏟아냈다.
“고태준 대표님, 심유하 씨와 3년간 이어 온 결혼 생활이 이렇게 끝난 게 아깝지 않으세요?”
“하예린 씨, 고 대표님이 배우님 때문에 이혼하셨는데, 본인의 행동에 도덕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하예린은 환한 얼굴을 들었다.
“저는 내연녀 노릇을 할 생각 없어요. 저랑 오빠는 이혼이 끝난 뒤에 정식으로 만나기 시작했어요.”
“오빠랑 선배님의 결혼 생활은 진작부터 문제가 있었던 거고, 그게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고태준은 곁에 서 있는 하예린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깝지 않아요.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사라졌다면 결혼은 감옥일 뿐이에요. 이혼하는 게 오히려 두 사람 모두에게 해방이라고 생각해요.”
제3화
단어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심유하의 가슴을 찔렀다.
‘감옥이라니...’
‘우리의 결혼 생활이 고태준에게는 이미 이렇게나 숨 막히는 것이었구나.’
곁에 앉아 있던 양선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심유하의 손을 잡았다.
눈빛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심유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고태준이 하예린의 치맛자락을 세심하게 들어주는 손에 시선이 닿자, 자조하듯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사실 심유하도 다를 게 없었다.
이미 그때의 사랑이 변해 버렸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며 자신을 속였으니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 달 뒤면 두 사람 모두 이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곧 시상식이 시작됐다.
최우수 여우주연상 발표 순서가 되자 심유하의 손바닥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미양’을 촬영할 당시 심유하는 그 작품이 자신의 평생 마지막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역을 완성하기 위해서 많은 공을 들였다.
오늘 밤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는다면, 자신의 국내 연기 인생에 완벽한 마침표를 찍는 셈이었다.
사회자는 수상자 명단을 들고 모든 후보를 일부러 한 차례 둘러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청화영화상 최우수 여우주연상은...”
“하예린 씨!”
객석에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하예린은 웃으면서 고태준의 뺨에 입을 맞춘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올라갔다.
심유하의 마음에 순간 실망감이 스쳤지만 곧 마음을 추슬렀다.
그러나 양선주가 분을 참지 못하고 심유하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유하야, 내가 따로 사람을 통해 알아봤는데, 심사위원들은 네 영화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았대. 최우수 여우주연상은 네가 받아야 했어.”
“혹시 고 대표가 심사위원들을 매수한 건 아닐...”
양선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유하가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아닐 거야.”
고태준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한창 사랑하던 시절에도 고태준은 심유하를 위해 뒤를 봐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판은 자연도태가 진행되는 판이야. 더 잘하지 못하면 자연적으로 도태되는 법이지. 아마 그쪽 연기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더 움직였겠지.”
양선주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 상업 영화가 어떻게 네 작품을 이겨?”
심유하는 달래듯 양선주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젠 중요하지 않아. 한 달 뒤면 영국으로 촬영하러 가거든.”
그 말에 양선주의 눈이 커지더니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흥분이 묻어났다.
“영국? 전에 너를 몇 번이나 찾아왔던 그 앨런 감독?”
심유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어! 앨런 감독이라면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명감독이잖아.”
“나중에 세계적인 배우가 돼도 나 잊으면 안 돼!”
심유하가 몇 번이나 약속하고 나서야, 양선주는 다른 일을 처리하러 자리를 떴다.
최우수 여우주연상 발표가 끝나자, 더 이상 시상식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진 심유하는 먼저 자리를 떠나 돌아갈 준비를 했다.
무대 뒤를 지나가던 중, 무대 옆에 서서 붉은 장미 한 다발을 들고 있는 고태준을 발견했다.
심유하는 손끝을 살짝 움켜쥐었다가, 못 본 척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등 뒤에서 아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말씀하신 대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은 하예린 씨에게 돌아가도록 바꿔 놓았어요. 더 준비할 게 있을까요?”
그 소리에 심유하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윽고 고태준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단속 잘하세요. 최우수 여우주연상이 원래 유하 거였다는 걸 예린이가 알게 되면 안 돼요.”
제4화
고태준의 말은 마치 벼락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심유하의 귀에 꽂혔다.
‘최우수 여우주연상이 원래 내 것이라고?’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심유하의 시선이 고태준의 손에 들린 붉은 장미 다발에 닿았다.
그저 너무나도 우스웠다.
고태준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자신 있게 장담했건만, 현실은 본인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쳤으니 말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뜨거웠던 모양인지 고태준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고태준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가 이내 다시 평온해졌다.
고태준은 장미를 안은 채 다가오더니 말투에는 난처하다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유하야, 이번 최우수 여우주연상은 예린이한테 양보해 줘. 이 비밀은 나 대신 지켜 주고, 응?”
심유하는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게 양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상은 원래 내 거잖아. 내가 왜 걔한테 양보해야 해?”
고태준이 넥타이를 한 번 잡아당기더니 말투에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다.
“너는 이제 연기 안 하잖아. 이런 헛된 명예가 무슨 소용이야?”
“게다가 오늘 네가 올린 댓글 때문에 예린이가 화가 나지 않았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해서 달랠 생각은 안 했어.”
귀에 거슬리는 말에 심유하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내 명예를 빼앗아 놓고 지금 나를 탓하는 거야?”
고태준은 심유하가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좀처럼 본 적이 없었다.
이에 고태준은 심유하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달랬다.
“유하야, 그런 뜻이 아니야. 그냥 요즘은 예린이한테 한창 마음이 가 있으니까 당연히 달래 줘야 하잖아.”
“언젠가 내가 예린이한테 흥미를 잃는 날이 오면, 그때 바로 최우수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되찾아서 너한테 줄게.”
“걱정하지 마. 누가 내 아내인지 나도 알아. 지금 예린이한테 하는 것도 그저 겉치레일 뿐이니까,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런 말은 지난 2년 동안 심유하가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무감각해질 정도였다.
그저 자신과 잠깐 놀고 있는 것뿐이라는 말, 아내의 자리는 여전히 심유하의 것이라는 말, 전부 겉치레일 뿐이라는 말.
고태준이 보기에는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오히려 아내인 심유하가 이런 일로 투정을 부린다면, 그쪽이 속이 좁고 철이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심유하는 고태준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눈가에 차오르는 눈물과 단전에서부터 느껴지는 쓰라림을 애써 눌러 삼켰다.
“이제 그럴 필요 없어. 다른 사람이 더럽힌 트로피는 이제 다시는 받지 않을 거니까.”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마친 심유하는 고태준의 표정이 어떤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시상식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심유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 안에 있는 자신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영국으로 가져갈 꼭 필요한 생활용품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를 전부 상자에 싸서 내다 버렸다.
자신과 고태준 사이의 물건들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두 사람이 연애하던 시절부터 결혼한 뒤까지의 사진 앨범, 거금을 들여 촬영한 대형 웨딩 사진, 정원에 고태준이 직접 심어 준 심유하가 가장 좋아하는 수국까지...
연애 4년, 결혼 3년. 두 사람은 이 집에서 함께 7년을 살았고, 집 안 어디에서나 두 사람이 함께 남긴 추억을 볼 수 있었다.
심유하는 꼬박 보름을 들여서야 추억이 가득한 물건들을 하나씩 모두 치울 수 있었다.
마침내 한때 온기로 가득했던 이 집은 7년 전 처음 이사 왔을 때처럼 다시 차갑고 쓸쓸한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 보름 동안 고태준은 단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심유하는 고태준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고태준의 습관대로라면, 새로운 연인이 생기면 적어도 한 달 동안은 그 여자의 곁에 붙어 있었다.
게다가 하예린은 워낙 드러내놓는 걸 좋아하는 여자라, 거의 매일 SNS에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자랑했다.
그저께는 고태준이 하예린을 데리고 바다로 나가 바다낚시를 즐겼고, 직접 요리까지 해 주었다.
어제는 고태준이 하예린의 촬영장을 찾아가서 다정하게 종아리를 주물러 주었다.
...
아마 집 안에 남아 있던 두 사람의 추억이 하나씩 치워지면서, 고태준을 향한 심유하의 감정도 마음속에서 조금씩 사라진 모양이었다.
이런 SNS 게시물을 보았을 때도 잠시 멈칫했을 뿐, 곧 아무렇지 않게 넘겨 버렸다.
집 안의 물건을 모두 정리한 뒤 심유하는 차를 몰고 쇼핑몰로 향했다.
영화 촬영 기간이 워낙 길어서 영국에 가면 적어도 2년 동안은 귀국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만큼 많은 짐을 가져가야 했다.
오후 내내 쇼핑몰을 돌아다닌 끝에 차 트렁크는 어느새 쇼핑백으로 가득 찼다.
심유하는 트렁크를 닫은 뒤 떠나려고 차에 올라타려고 했다.
한쪽 발을 막 운전석에 막 댄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심유하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심유하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세게 넘어졌다.
팔은 크게 까져 피부가 벗겨졌고 피가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심유하는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고, 그제야 자신에게 손을 댄 젊은 여자들 5, 6명을 똑똑히 보았다.
하지만 심유하는 이 여자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신들 누구예죠?”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자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혐오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중 한 여자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더니, 심유하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고 화를 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대표님 아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우리 예린이가 대표님과 함께할 수 없었던 거잖아.”
“이혼한 주제에 아직도 대표님 돈을 쓰고 있다니. 정말 뻔뻔하기 짝이 없네!”
제5화
두피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면서, 이 사람들이 하예린의 팬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하예린은 내연녀였고 심유하는 법적인 아내였다.
그런데도 저들의 눈에는 모든 게 심유하가 잘못했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늘 쇼핑하면서 사용한 카드는 심유하 본인의 카드였기에 고태준과는 눈꼽만큼의 관계도 없었다.
심유하는 힘겹게 입을 열어 설명하며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저는 고태준 돈 한 푼도 안 썼어요. 그러니까 이거 어서 놓으세요. 이렇게 하는 거 범죄인 거 몰라요?”
그러자 여자의 얼굴에 경멸 어린 웃음이 떠올랐다.
“흥, 아직도 거짓말을 하네.”
“얘들아, 다 같이 덤벼. 이년 좀 혼내 주고 예린이 화도 풀어주자!”
말이 떨어지자 빙 둘러서 있던 여자들이 곧바로 달려들었다.
저마다 온 힘을 다해서 심유하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걷어찼다.
심유하는 이렇게 많은 사람을 상대로는 전혀 저항할 수 없었기에, 그저 여자들의 폭행을 고스란히 견뎌 낼 수밖에 없었다.
차를 세워 둔 곳은 비교적 외진 곳이라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여자들은 갈수록 더 난폭하게 행동하면서 입에서는 계속 욕설이 쏟아졌다.
“여우 같은 년이 감히 우리 예린이한테서 남자를 빼앗으려고 해? 이번에 참교육 좀 당해봐.”
“여우주연상은 무슨. 내가 보기엔 다 몸으로 얻어낸 거겠지. 대표님이 예전에는 정말 눈이 멀었었네. 다행히 우리 예린이가 대표님을 구해줘서 망정이지.”
...
심유하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뽑혀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오장육부가 전부 뒤틀린 것처럼 온몸이 끊어질 듯 아팠다.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그제야 여자들의 주먹질이 멈췄고 심유하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경비원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심유하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심유하는 병원에 누워 있었다.
보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고태준이 침대 곁에 앉아서 심유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심유하가 깨어난 걸 본 고태준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유하야, 지금 좀 어때? 좀 괜찮아졌어?”
심유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빼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 때린 사람들은 잡았어? 고소할 거야.”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병상에 누워 있는 심유하를 바라보던 고태준의 눈빛에서 안쓰러움이 배어 나왔다.
“쇼핑몰 경비원이 바로 경찰에 신고했어. 그 사람들은 이미 경찰서에 잡혀 있어. 내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예린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곧바로 고태준의 팔짱을 꼈다.
“오빠? 어머, 선배님 깨어나셨네요?”
하예린의 시선이 심유하에게 향하더니 미안한 기색을 담아서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정말 죄송해요. 제 팬들이 폐를 끼쳤네요.”
“팬들도 저를 위해서 그런 거예요. 선배님이 저랑 태준 오빠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순간 화가 나서 손을 댄 거예요.”
입으로는 사과하고 있었지만, 하예린의 눈에 어려 있는 득의와 말투에 배어 있는 비꼼이 진짜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예린은 심유하가 맞은 걸 속으로는 무척 기뻐하고 있었다.
곧 심유하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죽을힘을 다해서 얼굴을 감싸지 않았다면 지금 얼굴을 다쳤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배우의 얼굴이 망가지는 순간, 연기 인생도 끝이었다.
“예린 씨, 예린 씨가 팬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대신 도와줄게요.”
“그 사람들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고소당할 각오나 하라고 하세요.”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하예린은 곧바로 나서서 자신의 팬들을 감쌌다.
“선배님, 제가 사과까지 드렸는데 왜 계속 물고 늘어지세요? 저는 절대로 제 팬들을 다치게 두지 않을 거예요!”
말을 마친 하예린은 눈가를 붉히며 촉촉해진 눈으로 고태준을 바라보았다.
“오빠, 지금 저는 여자친구고 선배님은 전처잖아요. 오빠는 누구 편을 들 거예요?”
평소 자존심이 강하던 하예린이 서러운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자마자, 고태준은 마음이 아파서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다른 것은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반사적으로 예린의 편을 들었다.
“물어볼 필요 있어? 당연히 우리 예린이 편이지.”
“걱정하지 마. 그 사람들은 무사히 풀려날 거야.”
그 한마디에 심유하의 머릿속이 순간 하얗게 변했다.
심유하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고태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 그렇게까지 연인을 감싸는 거야? 하마터면 내 얼굴을 망칠 뻔했다는 거 알아?”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예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선배님, 제가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건 선배님을 존중해서예요. 그렇다고 제가 함부로 모욕을 당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저랑 오빠는 두 분이 이혼하신 뒤에 사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는 오빠의 정식 여자친구고요.”
심유하는 이런 상황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흔히 한쪽 손바닥만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두 사람이 이혼 합의서에 사인하기 전에, 하예린이 정말 고태준과 조금도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태준처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두 달이나 끈질기게 쫓아다녔을 리 없었으니까.
하예린은 고태준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잃고 싶지도 않았고, 동시에 내연녀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도 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고태준은 달래듯 하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다시 심유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얼굴이 망가진 건 아니잖아. 얼마 배상 받고 싶어? 액수를 말해.”
제6화
머릿속에서 뚝하는 소리와 함께 이성이 끊어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원래부터 위태롭게 흔들리던 고태준과의 7년이 이제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깊이 파고들고 나서야, 심유하는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겨우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 정말 예린 씨를 아끼는구나?”
고태준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미간도 살짝 찌푸렸다.
심유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치료비로 1,400만 원 줘. 그럼 저 사람들의 책임은 더 이상 묻지 않을게.”
하예린이 조금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1,400만 원만요?”
심유하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1,400만 원만요.”
1,400만 원이면 됐다.
고태준과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7년을 이 돈으로 끝내는 셈이었다.
이 사랑과 이 결혼에도 이제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된 것이었다.
고태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1,400만 원을 송금하고는 하예린의 손을 잡고 병실을 떠났다.
병실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심유하는 몸을 뒤척이더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상처가 당긴 탓인지 모르겠지만 베개 위로 눈물이 번져 나갔다.
심유하는 10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그동안 고태준은 혼자서 한 번 찾아왔다.
하지만 심유하는 고태준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남자가 올 때마다 깊이 잠든 척하며 만나지 않았다.
퇴원한 뒤에는 몇 안 되는 친구들과 식사를 함께하며, 곧 출국한다는 소식을 친구들에게 전했다.
심유하가 다시 연예계로 돌아간다는 소식에, 친구들은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출국을 앞둔 마지막 며칠 동안 심유하는 거의 날짜를 세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지막 날, 가정법원이 문을 열자마자 심유하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한 달간의 이혼 숙려기간이 끝났고, 심유하는 무사히 이혼했다는 증명서류를 손에 넣었다.
가정법원을 막 나서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하예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한 프라이빗 회원제 라운지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심유하는 손에 들린 서류에 시선이 닿았다가 결국 약속 장소로 향했다.
심유하가 룸에 도착했을 때 하예린은 이미 와 있었다.
하예린은 옆에 놓인 우유를 들어서 한 모금 마신 뒤 웃으며 심유하를 바라보았다.
“선배님, 이번에 만나자고 한 건 다른 뜻은 없어요. 그냥 저랑 오빠를 놓아주신 게 고마워서요.”
“원래는 두 분이 이혼하신 뒤에 기회를 봐서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지난 한 달 동안 태준 오빠가 어찌나 저한테 붙어 다니는지, 저랑 몇 시간만 떨어져 있어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계속 제 곁에 붙어 있어야 했어요. 촬영할 때도 촬영장까지 따라와서 저를 지켜보고, 심지어는 체면도 내려놓고 제 매니저 역할까지 자처했어요.”
“그래서 오늘도 겨우 시간을 내서 나온 거예요.”
심유하는 물컵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고태준은 연애할 때 심유하에게도 똑같이 붙어 있었다.
다만 지금은 고태준에게 있어서 심유하는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됐을 뿐이었다.
하예린은 심유하의 변화를 날카롭게 알아차렸는지 입가의 웃음도 더욱 짙어졌다.
“선배님은 아직도 태준 오빠를 잊지 못하셨나 봐요? 안타깝게도 두 분은 이미 이혼하셨는데 말이죠.”
“오빠가 저를 쫓아다닐 때 제가 분명히 말했어요. 절대 내연녀가 되고 싶지 않다고요.”
“그랬더니 저를 위해 바로 이혼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역시 오빠 마음속에서는 제가 더 중요한가 봐요. 선배님은 이미 지나간 사람이니까요.”
심유하는 하예린이 영리하고 야망이 큰 여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태준을 3달이나 빠져들게 만들지도, 고태준이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내게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심유하는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나를 부른 게 단순히 자랑하려는 건 아닐 텐데?”
하예린이 가볍게 웃었다.
“선배님은 역시 똑똑하시네요.”
하예린은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심유하에게 내밀자, 여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도무지 하예린이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종이를 받아 든 순간, 초음파 검사라는 다섯 글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심유하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면서 뼛속이 마디마디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하예린이 임신했다고?’
하예린은 심유하의 반응에 아주 만족한 듯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한 손은 아랫배에 올린 채, 조금도 감추지 않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 저랑 오빠는 만난 지 1달 만에 아이를 가졌어요. 그런데 두 분은 결혼한 지 3년이나 됐는데도 아이 하나 없었네요. 정말 실패한 결혼이네요.”
심유하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들고 있던 검사지가 구겨졌다.
심유하와 고태준 사이에도 한때 아이가 있었다.
결혼 2년 차, 임신한 지 1달이라는 사실을 막 확인했을 때였다.
이 기쁜 소식을 고태준에게 전하려던 순간, 심유하는 남자의 옷깃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발견했다.
그것이 고태준의 첫 외도였다.
그날 밤 심유하는 밤새 눈물을 흘렸고, 다음 날 지나친 슬픔으로 유산했다.
고태준은 심유하의 병상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는 외도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고태준은 밖에서 연인을 하나둘씩 계속 만들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여자들과 아이를 만들진 않았다.
세상을 떠난 그 작은 생명은 두 사람 사이에서 금기와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고태준은 이제 그것마저 분명 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태준이 누구와 만나든, 누구를 임신시키든 이제 심유하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심유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 눌러 삼키고 검사지를 하예린에게 돌려주었다.
“축하해요. 두 사람에게 곧 좋은 일이 생기겠네요.”
하예린 얼굴에 떠 있던 득의양양한 표정이 곧바로 굳어졌다.
심유하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 소식을 받아들일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하예린이 심유하의 손목을 붙잡더니, 입꼬리에는 조롱 섞인 웃음이 걸려 있었다.
“선배님,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저를 죽도록 미워하고 계시겠죠?”
“공교롭게도 저도 오빠 곁에 선배님 같은 전처가 있는 게 싫어요. 선배님을 오빠의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거예요!”
심유하는 하예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하예린이 손목을 놓는 순간, 그대로 바닥에 세게 쓰러졌기 때문이다.
곧바로 허벅지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고, 하예린은 창백해진 얼굴로 아랫배를 감싸 쥐었다.
심유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꺼내서 119에 신고했다.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린아!”
제7화
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고태준이 떨리는 두 손으로 하예린을 안아 들었다.
“예린아, 무서워하지 마. 내가 지금 당장 병원에 데려갈게.”
심유하가 입을 달싹이면서 해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태준은 성큼성큼 품에 안은 하예린을 데리고 문밖으로 향했다. 심유하를 지나칠 때는 어깨로 강하게 부딪치기까지 했다.
심유하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고태준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품에 안긴 하예린을 달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심유하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를 선명하게 느꼈다.
심유하는 자신이 어떻게 병원에 도착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예린이 들어간 수술실을 찾아갔을 때, 고태준은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고태준은 티가 날 정도로 긴장한 표정이었고 정말로 하예린에게 정말 마음을 준 모양이었다.
심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반대편 의자에 앉아 수술 결과를 기다렸다.
복도에는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부부는 지금 마치 은하계 하나를 사이에 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것은 그저 침묵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태준이 충혈된 눈을 들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하야, 내가 아내 자리는 너뿐이고, 사랑하는 사람도 너뿐이라고 분명히 약속했잖아. 그런데 왜 예린이한테 손을 댔어?”
7년을 함께한 심유하는 고태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고태준은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고태준이 마지막으로 이렇게까지 화를 냈던 것은 심유하가 촬영 중 실수로 다쳤을 때였다.
당시 고태준은 심유하가 다쳤다는 이유로 촬영팀 전체에 화풀이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고작 자신의 어린 연인을 위해 화를 내고 있었고, 그 분노를 받아 내는 사람은 심유하였다.
정말 아이러니했다.
심유하는 눈을 내리깔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아파오는 쓰라림을 애써 삼켰다.
“나 예린 씨 밀지 않았어. 예린 씨가 일부러 나한테 누명을 씌운 거야.”
고태준은 코웃음을 쳤다. 말투에는 명백한 불신이 담겨 있었다.
“유하야, 너도 언제부터 사랑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딴 수법을 배운 거야? 내가 너한테 해 준 게 부족해?”
“아내 자리도, 내 사랑도 전부 네 거잖아. 나는 예린이랑 그냥 잠깐 즐기는 것뿐인데, 너는 그렇게까지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어?”
그냥 잠깐 즐기는 것뿐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라는 말을 들은 심유하는 가볍게 웃었다.
웃음은 쉬이 끊기지 않았고 웃을수록 눈꼬리는 더더욱 붉어졌다.
“거짓말도 너무 많이 하면 가짜가 진짜라고 믿게 되는 모양이네. 당신 심장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어봐. 지금도 정말 나를 사랑해?”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끊임없이 밖에서 다른 연인을 만들 수 있을까?’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다른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을까?’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자신을 조금도 믿어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심유하의 눈에 깃든 쓸쓸함과 죽은 듯한 고요함을 본 고태준은 순간 멈칫하더니, 마음속의 분노도 조금 가라앉았다.
그저 심유하가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질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한 달 동안 고태준은 하예린과 함께 있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심유하의 감정을 소홀히 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고태준은 심유하를 품에 끌어안았다.
“유하야, 조금만 더 기다려. 언젠가 밖의 여자들에게 흥미를 잃으면 자연스럽게 돌아갈게. 그때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뭐든 나도 함께해 줄게.”
돌고 돌아 결국 똑같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빈말이었다.
심유하는 고태준을 밀어내고 더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두 사람은 이미 정식으로 이혼했으니 더 이상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앞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혼자서도 해낼 수 있었다.
고태준은 심유하가 아직도 화가 나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이번 예린이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게 할게. 대신 예린이가 깨어나면 네가 사과해야 해.”
사과라는 말에 심유하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고태준이 나더러 사과하라고 한 거야? 대체 무슨 자격으로?’
심유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막 입을 열어서 반박하려던 순간,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 한 명이 황급히 뛰어나왔다.
“보호자 분, 환자분이 대량 출혈이 나셔서 A형 혈액이 급히 필요해요.”
고태준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서 비서에게 전화했다.
본인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 시내에 A형 혈액을 모두 병원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고태준이 다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심유하는 문득 와이어 액션 사고가 났던 그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당시 고태준은 몸으로 추락하는 심유하를 받아내서 구했고, 여자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하면서 정신을 잃었다.
심유하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간호사에게 팔을 내밀었다.
“저 A형이에요. 제 피부터 쓰세요.”
그 말에 고태준의 눈빛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고 하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유하는 고태준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간호사를 따라 채혈실로 향했다.
800밀리리터를 뽑고 나서야 채혈을 멈췄다.
심유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입술에는 핏기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상처를 누른 채, 심유하는 한 걸음 한 걸음 고태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입가에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아무것도 빚진 게 없어.”
7년 전 고태준이 목숨을 구해 준 은혜를 이제야 갚은 것이었다.
하지만 고태준은 심유하가 하예린을 밀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속죄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창백한 심유하의 얼굴을 바라보던 고태준의 마음 한구석에 안쓰러움이 피어올랐다.
“유하야, 먼저 집에 가서 쉬어. 예린이 괜찮아지면 내가 다시 보러 갈게.”
심유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기운 빠진 몸을 이끌고 몸을 돌려 떠났다.
고태준은 멀어지는 심유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입을 열어 심유하를 불러 세우려던 그때 수술실의 불이 꺼졌다.
고태준은 어쩔 수 없이 먼저 의사에게 하예린의 상태를 물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심유하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심유하는 미리 싸 둔 캐리어를 끌고 현관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가방에서 이혼을 증명하는 서류를 꺼내 신발장 위에 올려놓은 뒤, 종이 한 장을 꺼내서 고태준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을 적었다.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오늘로 완전히 끝났어.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말자.]
심유하는 쪽지를 서류 밑에 끼워 넣고, 7년 동안 살아온 이 집을 마지막으로 한 번 바라보았다.
7년 동안 이어진 모든 애증이 오늘로써 막을 내렸다.
이제 심유하는 자신의 인생이라는 책을 쓰러 떠날 것이다.